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는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당시 한반도에서 활약한 영국 출신의 미국 선교사입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1대 총회장으로 대한민국 개신교의 교단인 장로회의 아버지입니다. 한반도에 장로회를 전도한 최초의 목회 선교사이며, 연세대학교의 전신 중 하나인 연희전문학교와 경신학교의 설립자입니다.
언더우드가의 후손들도 현재까지 대한민국과 연세대학교에 대대로 기여하고 있으며 좋은 인연을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한국식 이름은 원두우인데 이는 언더우드를 한자로 음차한 말로 당시 고종 황제가 직접 지어줬다고 해요.
희망을 찾아 조선으로 오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미국 뉴저지주에서 태어나 뉴욕대학교와 뉴브런즈윅 신학교를 졸업한 재원이었습니다. 그는 1884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임명되어, 한국 땅을 밟으려 했지만 1884년에 갑신정변이 터지는 바람에 외국인 입국이 막히게되어 1년간 일본에 머무르면서 조선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감리회 선교사와 호머 헐버트의 도움을 받아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 중 가장 한국어를 잘 구사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고해요.
1년 뒤인 1885년, 그는 조선에 입국하게 됩니다.
결혼과 장로회 교회 설립
알렌의 설립안에 따라 1885년 4월 개원한 제중원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으로, 설립 목적에 의학생 교육이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1886년 3월 29일 개교한 제중원 의학당에서 언더우드는 영어, 물리, 화학 등 의예과 과목을 가르치며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888년에 파견된 여의사이자 8살 연상인 릴리어스 스털링 호튼(Lillias Stirling Horton, 1851~1921)과 1889년 3월 14일에 결혼했으며, 이들의 신혼여행은 평안도 지역으로 1,600킬로미터를 거의 도보로 이동하는 선교여행이었습니다.
1887년 서울에서 한국 최초의 장로회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고 평양부 일대로 교세를 확장했습니다. 이후 거의 20년 동안 언더우드는 평안도 전역을 순회하는 선교 여행을 반복했으며, 1891년 게일 선교사와 마펫 선교사가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서북 지역에 신앙 공동체를 설립했습니다.
의료와 복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다
1894년, 영국 출신 캐나다 선교사 올리버 에비슨이 조선 정부와의 협상 끝에 제중원을 선교부로 이관받아 완전한 사립 선교 기관으로 재편되었습니다.
1900년, 스탠다드 오일의 창립 멤버였던 루이 헨리 세브란스(Louis Henry Severance, 1838~1918)가 병원 건립을 위해 거액을 기부했습니다. 평양부 선교사들의 이의제기가 있었으나 언더우드의 중재로 갈등이 해결되었고, 1904년 제중원은 새로 지어져 세브란스 병원과 세브란스 의학교로 탄생했습니다.
교육의 빛을 밝히다: 연세대학교의 시작
번역과 교육에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 입국 직후부터 신약의 4대 복음서를 번역했으며, 한국 체류 30년 동안 한불 사전, 한영 사전, 한영 문법을 편찬했습니다. 1885년 서울 정동에 한국 최초의 고아원이자 남학교인 원두우학당(후의 경신학교)을 설립했고,
1915년에는 경신학교 대학부(후의 연희전문학교, 연세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의 형 존 언더우드(John Thomas Underwood, 1857~1937)가 토지 매입과 건축 비용을 지원했습니다.
1928년 연희전문학교 교정에 동상이 세워졌다가 1940년대 태평양 전쟁 중에 일제가 포탄을 만든다고 동상을 뽑아가는 바람에 광복 이후에 다시 세우게 되었습니다. 헌데 한국 전쟁이 일어나면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동상을 또 뽑아가는 바람에 전쟁이 끝나고 3번째 동상을 다시 만들게 되었다고...
그러나 평양부 교회 설립, 경신학교 설립, 번역 작업 등으로 과로와 일본어 학습까지 겹쳐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1916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와 요양을 받았으나 그 해 10월 16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한국으로 옮겨져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언더우드 가문
언더우드의 친형인 존 언더우드 역시 연세대에 기여한 바가 큽니다. 미국에서 타자기 생산 기업을 세워 자수성가했는데 1917년에 거액을 연전에 기부해 그 기부금으로 신촌에 드넓은 교지를 매입해 본관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2세 元漢慶(원한경,Horace Horton Underwood) 박사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연희전문학교로 돌아와 교육학을 가르쳤으며, 3代 교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제암리 학살 사건을 외신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1951년에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元박사의 부인인 에델 부인이 공산당의 테러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UN 대표로 갔다 온 모윤숙을 초청해 자택에서 20여 명이 교수부인회 모임을 열던 날 복면을 쓴 한 청년들이 초인종을 누르고 불법으로 침입해 총을 쏘고 달아났습니다. 5일 뒤 잡힌 범인들은 연희대학 학생들로, 민주학련위 위원장 등 공산당 학생 간부들이었습니다. “UN 갔다 온 모윤숙을 쏘려다가 빗나갔다”고 자백을 했습니다.
※모윤숙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수필가로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 친일 문학 활동에 참여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당시 그녀는 친일 단체에 가입하고, 일본의 전쟁을 찬양하는 시를 발표하는 등 친일 행적이 드러나 해방 후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반공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절에는 UN 총회 한국 대표단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고문 등을 역임하며 정치적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활동과 친일 행적은 그녀의 문학적 평가와는 별개로 역사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3세 元一漢(원일한,Underwood, Horace Grant) 박사는 생전에 『내 몸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을 사랑하셨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 후 전역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美 해군에 再입대하여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습니다.
UN軍 정전협상 수석 통역장교를 맡아 정전협상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어요. 연세大 교수와 韓美협회 부회장, 한국성서공회 이사, 광주기독병원이사, 韓美우호협회 고문 등 활발한 활동을 하시다가 2004년 1월에 한국 땅에서 삶을 마쳤습니다. 언더우드 1세부터 3세까지 서울 마포구 합정동 외국인 묘지공원에 안장됐습니다.
4대손인 원한광((Horace Horton Underwood Jr.)은 1943년생으로 연세대 영어영문학과에서 30년간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인의 영어 교육론에 대해 연구했으며, 한미 교육 위원단장을 역임했습니다. 1980년에 5.18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해외에 알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강제 추방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1987년, 5공이 막을 내리고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학부장으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2004년에 아버지 원일한 박사가 작고하고 모든 언더우드 일가의 고서 보관본과 근대사 자료를 기부하고 미국으로 떠나셨습니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님과 그 가문은 낯선 땅 조선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그 씨앗이 싹을 우고 자라나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의 숭고한 정신과 업적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 법정에서 독립을 외치다: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 | 2025.07.11 |
---|---|
미스터 션샤인 속 그 인물? 한글의 과학성을 알아본 선구자 호머 헐버트의 한글 사랑 이야기 (2) | 2025.07.10 |
제암리 학살을 세계에 알린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의 한국 독립운동 이야기 (1) | 2025.07.08 |
미국 상원에서 울려 퍼진 독립의 목소리, 셀던 파머 스펜서 (2) | 2025.07.06 |
일신여학교에서 피어난 독립의 꽃, 호주 선교사 3인 '데이지 호킹, 마거릿 샌더먼 데이비스, 이사벨라 멘지스' (1) | 2025.07.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