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제암리 학살을 세계에 알린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의 한국 독립운동 이야기

픔_Peum 2025.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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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향한 펜,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 기자님은 캐나다 출신의 스코틀랜드계 언론인이자 작가입니다.

그는 1904년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대한제국을 처음 방문했습니다.

당시 그는 일본 제국 육군의 종군기자로 활동하다가 영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수 세대가 지나야만 치유될 수 있는 아픔, 일제침탈의 현장을 보다

 

1906년 여름 다시 한국에 온 맥켄지는 16개월 동안 머물며 일제의 침탈과 독립운동, 항일 의병들의 활동상을 직접 취재했습니다. 그리고 그 실상을 담은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1908년 발간했죠.

 

21개 장으로 구성된 책에서 맥켄지는 대한제국의 실상과 멸망 과정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일제의 잔혹한 만행과 민초들의 고초, 그리고 항일 의병의 생생한 모습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외국 언론인에 대한 탄압과 방해공작을 겪으면서도 의병을 직접 만나기 위해 충주로 발길을 잡았던 맥켄지는 서울 인근의 이천에서 일본군들이 많은 부락을 태워버렸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천으로 향하는 길에서 70~80호 정도의 마을과 제천이 일본에 의해 폐허가 된 것을 목격했죠.

 

일본군이 한 마을을 평정하고(폐허로 만들고) 나면 순진한 수백 가구가 의병에 투신했다”고 밝힌 맥켄지는 “(폐허가 된) 마을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자신의 생업을 조용히 누리는 것 뿐”이라며 “적어도 어느 한 지방은 초토화 작전으로 그토록 유복하던 곳이 폐허가 되었고 의병의 수는 날이 갈수록 증가했는데, 이때 뿌려진 증오의 씨앗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수 세대가 지나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찾아 나선 의병, 그들을 만나다

특히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명령에 항의하여 일어난 정미의병의 활동을 취재하며,  

어렵게 의병을 만난 맥켄지는 무기, 의복, 지원 등 그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의병들이 매우 측은하게 보였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의병들을 측은 혹은 가엽게 생각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명확히 했다.

 

맥켄지는 군인(의병)의 영롱한 눈초리와 얼굴에 감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았을 때, 나는 확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표현 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동포들에게 애국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1907년 9월24일 저녁 무렵 경기 양평읍내에 들어와 최초로 의병들을 만나 찍은 사진이며

 

 

1907년 9월25일 영국 데일리메일 신문기자 프레드릭 아서 매켄지가 촬영한 한말 무장의병 사진입니다. 매켄지 일행은 당시 서울로 가려고 양평읍내를 떠난 뒤 일본군으로 오인을 받아 의병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위기를 모면한 뒤 이들 중 일부를 세워놓고 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우리가 의병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진을 촬영한 인물이 바로 매켄지입니다. 이 사진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재현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한국의) 자유와 정의를 기원한다(I plead for Freedom and Justice)" –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 서문에서

 

매켄지 기자님은 한국을 떠난 후에도 한국의 독립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20년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한국의 독립운동(Korea’s Fight for Freedom)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일제의 잔혹한 실상과 한국인들의 강력한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1919년 봄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항에서 펼친 평화로운 봉기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The peaceful uprising of the people of Korea against Japan in the spring of 1919 came as a world surprise)”라고 서문을 시작한 맥켄지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특히, '자유를 위한 소녀들의 순교(GIRL MARTYRS FOR LIVERTY)'란 소제를 붙인 17장에서는 한국독립운동의 가장 극적인 장면은 소녀들과 여성의 참여다(The most extraordinary feature of the uprising of the Korean people is the part taken in it by the girls and women)”라고 정의하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탄압하고 잔혹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일제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19193.1 운동 이후 발생한 제암리 학살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의 증언을 토대로 이 참혹한 사건의 전모를 보도하며 일제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고발했습니다. 그의 보도는 당시 서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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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친우회

 

191911월 독립운동가 김규식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위해 홍보 사업 분야에서 가능한 것을 다하겠다고 알린 맥켄지는 19201026일 영국 런던에서 ‘한국친우회’를 창립했습니다.

 

영국 국회의원 17명을 포함해 에딘버그 대학 학장과 학자, 언론인, 귀족, 목사 등 유력인사 62명이 참석한 창립식에서 맥켄지는 일제의 식민정책을 비판하는 것과 동시에 한국의 실상을 알렸습니다.

 

미국 출생인 톰킨스는 목사로 활동하며 '미주의 3·1운동'으로 평가받는 '1차 한인대회(1919)'에서 자유·정의·인도 등의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한국 독립운동의 원칙과 방향을 제안했습니다.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한국친우회가 결성되자 회장을 맡아 3·1운동을 탄압한 일제의 비인도적인 만행을 규탄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대중집회를 주도했습니다.

 

프랑스 출생인 마랭은 저명한 정치인이자 인류학자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한국의 독립을 지지했습니다.

 

1921년 프랑스의 한국친우회 창립대회에서 "3천만의 인구를 가진 불행한 나라 한국이 고통을 받고 있으며 정의를 요구하고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마랭은 프랑스 한국친우회 초대 회장이었습니다.

 

 

정부는 이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매켄지에게 2014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톰킨스와 마랭에게는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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