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박열의 아내, 일본인 독립유공자 가네코 후미코의 삶

픔_Peum 2025.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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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일본인 여성으로, 한국 독립운동가 박열의 동지이자 아내였습니다.
오늘은 그녀의 삶과 독립운동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생애와 독립운동


가네코 후미코는1903년 일본 야마나시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했으며, 1919년 일본으로 돌아온 후 도쿄에서 신문팔이, 행상, 식모살이, 식당 종업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꾸준히 공부했습니다. 이 시기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1922년,그녀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박열을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함께 무정부주의자 단체인'흑우회'를 결성하고 기관지를 발행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박문자(朴文子)'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한국 독립운동을 옹호하고 일제의 탄압 정책을 비판했습니다.

 

체포와 재판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은 일본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들이 일왕 암살을 계획했다는 혐의로'대역사건(大逆事件)'으로 기소했습니다.


1926년2월26일 도쿄 대심원 법정 공판에서 박열은 조선 예복과 사모관대를 입었으며 그녀는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자신의 이름을 '박문자'라고 밝히며, 의연한 태도로 박열과 함께 사형 선고를 요구했습니다. 실제로 사형 판결을 받았을 때는 만세를 외치기도 했습니다.

 

죽음과 유산


사형 선고 후10일 만에 일본 정부는 두 사람의 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습니다. 그러나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정부의 기만 술책에 저항하며 은사장(恩赦狀, 사면장)을 찢었고, 그녀는 1926년 7월 23일, 향년 23살의 나이로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습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서류상으로 결혼을 했기 때문에 그녀의 유골은 박열의 형이 인수하여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 안장되었습니다.여사의 묘는 경북 문경읍 팔영리에 조성됐지만 일제의 철저한 감시 속에 방치된 채 잊혔습니다.
그러다 1973년 아나키즘 독립지사들이 뜻을 모아 묘역을 정비하고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후 2003년 박열의사기념공원 조성과 함께 현재 위치인 박열의사기념관 내로 이장하게 됐습니다.

 

독립유공자 인정


2018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맞이하여 가네코 후미코는 생을 마감한 지 92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녀는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인이면서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국적과 민족을 초월한 정의와 자유를 위한 투쟁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일제강점기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한일 양국의 역사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영화 '박열'(2017)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으며,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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