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속에서 빛나는 한 외국인의 이름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바로 미국인 선교사이자 한국의 독립을 열렬히 지지했던 윌리엄 린튼(William Alderman Linton) 선교사님입니다.
낯선 땅 조선으로 향한 청년 윌리엄 린튼
윌리엄 린튼은 1891년 2월 8일 미국 조지아주 토머스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지적 능력을 보여 조지아 공과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안정된 미래가 보장된 미국에서의 삶 대신, 그는 낯선 동양의 작은 나라, 조선으로 향하는 용기 있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1912년, 22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 땅을 밟은 그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교육을 통한 독립 정신 함양: 군산 영명학교 교장
한국에 도착한 윌리엄 린튼 선교사님은 군산 영명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당시 일제 식민지배 하에 있던 한국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17년에는 영명학교의 교장이 되어 한국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의 교육은 학생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3.1 운동의 최전선에서: 군산 만세시위의 주역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운동의 불길은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윌리엄 린튼 선교사님은 이 역사적인 순간에 군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며 한국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섰습니다. 군산 만세운동은 서울의 3.1 운동 이후 한강 이남에서 일어난 첫 번째 대규모 만세시위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큽니다.
그는 이뿐만 아니라, 같은 해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남장로교 평신도대회에 참석하여 3.1 운동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고했습니다. 또한, 애틀랜타 신문에 기고문을 실어 비폭력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일제의 잔혹한 만행을 국제사회에 폭로하며 한국의 독립을 위한 국제적인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대를 이은 한국 사랑: 린튼 가문의 유산
윌리엄 린튼의 가족 이야기는 그의 장인인 유진 벨(Eugene Bell) 선교사로부터 시작됩니다.
유진 벨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는 광주와 목포 지역에서 활동을 하며 학교와 병원을 설립했습니다. 윌리엄 린튼은 유진 벨의 큰 딸인 샬럿 벨(Charlotte Bell)과 결혼하면서 한국과의 인연을 시작했습니다.
윌리엄 린튼과 샬럿 벨 부부는 함께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들은 1940년까지 부부 선교사로 일하다가 일제에 의해 추방당했으나, 해방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선교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린튼 부부 사이에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이 중 셋째와 넷째 두 아들이 부모를 따라 한국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이는 외할아버지 유진 벨에 이어 3대째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입니다.
▶아들 휴 린튼(인휴)
윌리엄 린튼의 아들인 휴 린튼(한국명: 인휴)은 1926년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휴 린튼은 한국전쟁 당시 미 해군 대위로 인천 상륙 작전에 참전하기도 했으며, 전라남도 순천을 중심으로 600여 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결핵 퇴치 활동에 매진했습니다.
▶ 손자 인요한(존 린튼)과 인세반(스티븐 린튼)
휴 린튼의 아들들인 인요한(존 린튼)과 인세반(스티븐 린튼)은 린튼 가문의 4대째로 한국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인요한 교수는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로 활동하며 한국 의료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국민의힘 비례대표입니다.
인세반은 유진 벨 재단의 회장을 맡아 북한 의료 지원 사업을 이어가며 북한 어린이들에게 의약품을 보내고 있습니다.
▶ 5대째 이어지는 한국 사랑
5대째인 조카 데이비드 조나단 린튼(인대위, 인요한의 아들)은 기업법 미국 변호사이자 스타트업 투자자 및 자문가입니다.
조카 레이첼 조이 린튼도 독립유공자의 자손에게 부여하는 대한민국 국적을 수여받고 복수국적을 허용받았습니다.
이들은 "린튼네 사람들"로 불리며, 한국에 대한 깊은 사랑과 헌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남대학교에는 윌리엄 린튼을 기념하는 두 채의 한옥이 있으며, 이는 린튼 가문의 한국 사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윌리엄 린튼 선교사님은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기에 한국인의 아픔을 함께하고 독립의 염원을 지지했던 진정한 친구였습니다. 그는 교육을 통해, 그리고 직접적인 독립운동 참여와 국제사회에 대한 호소를 통해 한국의 독립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2010년에는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린튼 가문은 한국의 교육, 의료, 선교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윌리엄 린튼은 한남대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한국 사회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한국 사랑은 단순한 선교 활동을 넘어, 한국의 독립과 발전을 위한 헌신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윌리엄 린튼 선교사님과 같이 한국을 사랑했던 수많은 외국인들의 헌신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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