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잊혀진 34번째 민족대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트 (석호필)박사의 한국 사랑 이야기

픔_Peum 2025.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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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 속에서 빛나는 한 분,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는 영국에서 태어난 캐나다인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뜨거운 마음으로 한국을 사랑하고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이셨죠. 한국인에게는 '석호필'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그의 삶 속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한국에 온 푸른 눈의 친구, 석호필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315~ 1970412)는 영국 태생의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이자 수의학자, 세균학자로 일제 강점기 한국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자신의 한국식 이름인 '석호필(石虎弼)'을 사용했는데,

이 이름은 그의 종교적 굳은 의지()호랑이처럼 강인하게() 한국인을 돕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스코필드는 1916년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 올리버 알 에비슨의 권유로 한국에 왔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했습니다. 1917년에는 '선교사 자격 획득 한국어 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한국어에 능통했습니다.

 

3.1운동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다

 

191931, 민족의 염원이 담긴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펼쳐졌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님은 이 역사적인 순간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하며,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는 탑골공원에서 만세 시위를 하는 민중들과 일본의 탄압을 사진으로 찍고 글로 적어 해외에 알리셨죠.

 

 

특히 4월에는 수원 제암리로 가 일본군이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학살한 제암리 학살 사건 현장을 직접 방문하셨습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잿더미가 된 현장을 촬영하고, 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일제의 잔혹한 만행을 고발했죠. 이는 당시 일제의 감시 속에서 진실을 알린 매우 용기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위로하는 일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3·1 운동의 제34"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나는 한국인이다" 그의 끝나지 않은 한국 사랑

 

 

스코필드 박사님은 1920년 일제의 감시와 살해 위협으로 인해 잠시 한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대한 그의 사랑은 변치 않았습니다. 그는 1926년 한국을 잠시 방문한 뒤 캐나다로 돌아가는 길에 쓴 편지에서 "조선은 나의 고향과 같이 생각됩니다"라고 밝혔고, 1931년에는 "나는 '캐나다인'이라기보다 '조선인'이라고 생각됩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한국을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해방 후인 1958, 대한민국 정부는 광복 13주년 기념식에 스코필드 박사님을 국빈으로 초청했습니다.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과 교육 장려 활동에 힘쓰셨습니다.

 

영원한 한국의 친구, 34번째 민족대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님은 197081세의 나이로 한국에서 생을 마감하셨고, 한국 독립운동에 기여한 업적을 인정받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는 '3.1운동의 34' 또는 '34번째 민족대표'라고 불릴 만큼 한국 독립운동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신 분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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