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l) -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

픔_Peum 2025.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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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의 삶, 조선과의 인연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은 1872년 영국 브리스톨에서 태어났습니다. 16세부터 일본 고베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04년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 특파원 자격으로 한국 땅을 밟게 됩니다.

 

이때 그는 일본이 한국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분개하며, 단순한 기자가 아닌 조선의 독립을 돕는 길을 택하게 됩니다.

 

2. 펜으로 일제에 맞서다: 대한매일신보의 탄생

 

베델은 특파원 생활을 그만두고 1904718, 독립운동가 양기탁 선생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합니다.

대한매일신보는 베델이 영국인이었기에 '치외법권'이라는 특수한 지위를 활용하여 일제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 다른 언론들이 일제의 사전 검열로 인해 자유로운 보도를 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강점이었습니다.

 

1905년부터는 국문판과 영문판을 분리하여 발행하며, 특히 국문판에 국한문을 혼용하여 박은식, 신채호 같은 민족주의 지사들을 주필로 영입했습니다. 이처럼 대한매일신보는 단순한 신문이 아니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는 항일 운동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1907년에는 발행 부수가 1만 부를 넘어서며 당시 최대 신문사로 성장했습니다.

 

3. 영원히 기억될 그의 유산

 

베델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고종 황제의 친서를 게재하여 일제의 침략을 해외에 알리는 데도 힘썼습니다. 그의 항일 활동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을 받았고, 결국 재판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심근비대증으로 1909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묘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습니다. 묘비에는 장지연이 비문을 썼는데 늘 베델을 눈엣가시로 여긴 일본에 이 비문마저 깎아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수난을 당한 묘비는 196444, 편집인 협회가 전국의 언론인들의 뜻을 모아 성금으로 그의 묘비 옆에 조그만 비석으로 비문을 복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델이 남긴 유언은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였습니다.

그의 죽음에 고종 황제도 애통해했다고 합니다..

 

 

그의 바람처럼 대한매일신보는 한일 병합 직전까지 항일 언론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195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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